역사 이야기들 / / 2023. 12. 7. 03:14

전설적인 반역자 파우사니아스 (Pausanias, ? ~ BC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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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파우사니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꽤 여러명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수 많은 인물 중에서 가장 극적이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전설적인 반역자 파우사니아스 (Pausanias, ? ~ BC470)
전설적인 반역자 파우사니아스 (Pausanias, ? ~ BC470)

 

 

300의 레오니다스 1세와 파우사니아스

 

2007년 개봉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명작 '300'에서 제라드 버틀러가 연기한 위대한 스파르타의 왕은 '레오디나스 1세 (Leonidas I)'입니다.

그는 스파르타의 왕으로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아기아드 왕조의 17대 왕이었습니다. 

 

영화의 주된 줄거리인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기원전 480년에 있었던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로,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의 영웅이자 지도자로서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투에서 패하였지만 다음 해에 페르시아의 침략자들을 쫓아 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알아볼 '파우사니아스 (Pausanias)'는 신화 속의 인물로 인정받는 '레오니다스 1세'의 조카로서 스파르타 왕 중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후계자는 아니었습니다.

레오니다스 1세가 전사 한 후 왕의 아들 플레이스타르코스의 세력이 미약할 때 스파르타의 섭정으로 집권한 섭정왕이었습니다.

 

 

 

전설적인 반역자

 

파우사니아스는 기원전 479년 그리스 연합군의 지도자로서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페르시아와 그 동맹국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지 1년 후,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와 공모하여 그리스인들을 배신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기원전 470년 스파르타에서 동료 시민들에 의해 감금되어 굶어 죽었습니다.

 

위대한 장군에서 전설적인 반역자로 한 해만에 신분이 추락한 파우사니아스의 행동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리고 스파르타 군대의 엄격한 규율을 생각하면 파우사니아스의 배신행위는 특히 충격적인 것입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세계의 초강대 도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문화는 아테네와는 크게 다르게 훌륭한 전사를 배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전사들은 어린 시절부터 전장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스파르타는 철학자나 예술가, 극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전사로만 유명한 도시 국가였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비록 평소에는 서로 적대적이긴 하였지만, 페르시아라는 외부의 적에 맞서 그리스를 지키는 것에는 뜻을 같이 하였으므로 연합전선을 형성하였습니다.

기원전 480년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패하면서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디나스 1세가 전사하였고, 파우사니아스는 다음해 플라타이어 전투와 기원전 478년 비잔티움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어 승리를 거두면서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대부분의 도시 국가가 스파르타 아니면 아테네 편을 들면서 그리스 연합군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파우사니아스의 고압적인 행동에 많은 그리스 국가가 아테네를 지지하면서 스파르타는 곤경에 처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더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파우사니아스가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헬롯(Helot)이라 불리던 스파르타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대신 자기 부하로 삼겠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기원전 478년 페르시아인들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어 스파르타로 소환되었고 수년간 조사를 한 끝에 기원전 474년경에 그의 음모를 밝혀냈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추격을 피해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아테나 신전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파우사니아스의 어머니인 테아노는 즉시 신전으로 가 문 앞에 벽돌을 쌓고 '스파르타인이 될 가치가 없는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신전의 문을 벽돌로 막고 파우사니아스를 굶어 죽게 했습니다.

 

 

 

파우사니우스를 위한 변명

 

기원전 478년 페르시아인과의 공모 혐의로 제기된 주장 중 하나는 그가 키프로스와 비잔티움을 점령한 후 페르시아 왕의 친구이자 친척이었던 전쟁 포로들 중 일부를 석방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파우사니아스는 그들이 석방된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주장으로 파우사니아스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편지를 보내 전쟁을 중지하는 대신 크세르크세스 1세의 딸과 결혼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에 동의한 후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의 관습을 채택하고 페르시아 귀족처럼 옷을 입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두 주장은 결국 증거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개의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릴만한 충분한 증거가 부족하여 기소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체포되었다가도 풀려나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아테네와 많은 그리스 동맹국들은 파아사니아스의 오만함과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스파르타 내부에서도 파우사니아스가 헬로트족을 해방시키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는 전설적인 반역자가 아니라 스파르타를 시기하는 외부 세력과 진보를 두려워하는 내부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무고한 피해자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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