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들 / / 2023. 12. 7. 03:36

정복왕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 BC356~323), 세계를 지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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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역사가들의 표현을 따르면 알렉산더 대왕은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적국이 없고, 한 번도 포위하지 못한 도시가 없으며, 지배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점령한 곳은 사실상 그리스인에게는 전 세계에 해당하는 영역이었습니다.

오늘은 위대한 정복왕이자 통치자인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 몇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정복왕 알렉산더
Alexander the Great, BC356~323
 

 

알렉산더, 왕이 되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 북부의 그리스 왕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필립 2세였고, 어머니는 그의 아내 중 한 사람인 올림피아스 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지만 아랍권에서는 이를 음역한 페르시아 어형인 '이스칸다르'라고 부릅니다.

 

알렉산더는 당시 이름 높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직전 제자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은 플라톤이었고 플라톤의 스승이 바로 '소크라테스'였습니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인류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위대한 철학자의 학맥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젊고 뛰어난 왕자에게 과학과 문학, 철학에 대한 애정을 심어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도 꽤 많지만 소크라테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으로 이어지는 4명의 사제관계는 워낙 대단해서 가장 널리 알려져있는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왕좌에 오르다

 

알렉산더는 스무 살이 되던 해인 기원전 336년, 아버지 필립 2세가 암살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시켜 '아테네'와 '테베'와 같은 도시 국가를 지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차례차례 이집트와 인도 그리고 그리스의 숙적이었던 페르시아 왕국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2년 전 필립 2세의 지휘하에 아테네-테베-아르고스 연합군을 격파한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참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군사적 업적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즉위 1년 후인 기원전 335년 '하이모스 산 전투'부터 매년 원정을 떠나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마케도니아를 위대한 국가로 성장시킨 그와 그의 군사는 이후 수십 개의 도시를 세웠고, 결국에는 세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에게 점령자로서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던 다른 정복자들과 달리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여러 가지 페르시아 관습을 수용하였습니다. 또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화합을 위해 수천 명의 군인들에게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하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위대한 정복왕의 죽음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3년, 바빌론 원정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의 사인에 대해 많은 의문이 남아있지만 1998년에 한 연구팀은 그가 장티푸스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짓기도 하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사후에 미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그의 이름을 딴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져 수 세기 동안 진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 알렉산더 대왕의 시신이 알렉산드리아로 가게 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Diodorus Siculus(기원전 90년~기원전 30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40권짜리 역사서 'Bibliotheca Historicala'에 알렉산더 대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에 따르면 알렉산더의 시신은 이집트 방식으로 미라화 되었고, 투탕카멘의 석관과 유사한 거대한 황금 유인원 석관에 안치되었습니다.

그 후 반암으로 덮힌 또 다른 황금 관에 놓였다고 설명합니다.

알렉산더의 관은 64마리의 노새가 이끄는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마차에 안치되어 페르시아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마차의 최종 목적지는 이집트였고, 서부 사막의 '시와(Siwa) 오아시스'에 있는 아문라 신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의 그리스-이집트 혈통을 발견하게 될 알렉산더의 장군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는 그의 군대를 시리아로 진군하여 코르테주를 맞이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 석관의 종점으로 시와(Siwa) 대신 알렉산드리아를 제안하였고, 앞서와 같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랜 시간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또 다른 장군인 '페르디카스'가 실제로 마케도니아의 '아이가이'로 호송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말하는 '아이가이'는 알렉산더 대왕의 조상이 묻힌 곳입니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갓난아들의 섭정으로 지명되었으며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는 페르디카스 장군에게서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을 강제로 뺏고 선전 목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가져갔다고 추측되기도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랜 시간 전시되었다는 것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정작 알렉산더 대왕의 무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화려한 석관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묻혔을 것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시와(Siwa)의 고대 요새의 폐허, 시와의 오아시스 등에서 거대한 헬레니즘 왕릉이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지만 정작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이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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